[편집국 칼럼] 하심 (下心)
[편집국 칼럼] 하심 (下心)
  • 강성정 기자
  • 승인 2024.05.13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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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정 편집국장
강성정 편집국장

 그는 향기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향기는 입에서 내뱉는 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나름의 기준까지 세웠다.

여기에는 어렸을 때부터 간간이 들었던 어머니의 조언이 컸다. “비단이 곱네 뭣이 곱네 해도 말처럼 고운 것이 없단다”라는 어머니의 깊은 사유는 그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곱씹는 가르침이 됐다.

그러나 생각처럼 고운 말은 쉽지 않았다. 워낙 내성적인데다 무뚝뚝하기까지 한 성품때문이라고 그는 여겼다.

오죽했으면 그는 ‘이방인’(알베르 까뮈 작)에 나온 뫼르소를 닮았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뫼르소는 세상 일에 별 관심이 없는 인물로 그려졌다. 어머니의 죽음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책의 초반부에서 그의 호기심은 극에 달했다. 자신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제발 기우이길 바랐다.

고운 말을 가로막는 데는 자존심도 한 몫했다. 남을 이기고 존경을 받으려면 논리적이고 거친 표현이 전제돼야 한다는 게 그의 평소 신념이었다. 상냥하고 친절한 말로는 자존심을 지킬 수 없을 뿐아니라 상대방보다 하위에 있다는 굴복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부드럽고 고운 말을 들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들은 다양하다. 일부는 동화돼 친절한 피드백이 되돌아오는가 하면 일부는 자세를 곧추 세우며 거드름을 피운다.

그의 부드러운 말씨는 아주 형식적이고 일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과 별 상관없는 사람에게만 내뱉어졌다. 그러다가도 상대의 조그마한 빈정상한 말을 놓치지 않았다. 여지없이 고약한 말투로 상대를 할퀴기 시작했다.

“역시 강한 표현만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다”는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그의 후회는 이어졌다. 언제나 그랬듯 격렬한 설전과 거친 언사 뒤에는 허무함과 자책감만 남았기 때문이다. 결국 악취만 풀풀 풍기다 죽는 건가. 도대체 왜 나는 잘 안될까...

원인을 찾아도 답은 없었다. 책이나 위인들을 뒤져봐도 구체적 수행방법은 찾기 힘들었다. 그럴 듯한 말이나 문구가 아닌 간단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스스로의 다짐만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나를 이끌 무언가는 어디에 있는걸까”. 그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흰 머리가 하나 둘 씩 늘어가던 어느날 문득 하심(下心)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불가에서 말한 돈오돈수(頓悟頓修)였을까. 이때부터 그는 하심에 대해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나를 낮춰야 비로소 고운 말이 입가에 맴돈다. 상대가 누구든지간에 상관없다. 비난을 쏘아붙여도 괜찮다. 무시를 당해도 당연하다. 나는 낮은 지위에 있으니.

불가에서는 내세울 것 없는 마음이 곧 하심이라고 한다. 내세울 것 없는 것은 주장할 것이 없는 것이고 주장할 것이 없는 것은 곧 아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아는 것이 없는 것은 집착할 것이 없는 것이고 집착할 것이 없으니 언제나 텅 비어서 걸릴 것이 없다.

아는 것이 있으면 그 아는 것을 붙잡아 두려한다. 아는 것을 주장하여 상대방을 짓밟으려 하니 언제나 시비,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는 것이 남아 있어 하심이 잘 되지 않는다면 그 아는 것을 부셔야한다’알 듯 모를 듯한 글귀였으나 그는 어렴풋이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하심을 실천하는 길만 남았다.

평생 하심을 거부했던 그에게 하심의 실행 여부는 그야말로 관심이다.

그는 최근에 이런 말을 했다.

“달력을 보니 부처님 오신날이 곧 다가오더군”

“세상만사에는 인연이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것도 따지고 보면 당나라 유학을 원했던 인연이 얽힌 것이 아닌가”

“세상이 살만하다는 극소수의 항변은 나름 일리가 있어”

“나도 그 극소수에 끼고 싶은데 잘 될란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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