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조사단, 연병장·건물지·화장실·기와편 등 확인
학계 “호남의병운동사 재조명할 쾌거…복원 절실” 기대
군민 “기삼연 대장과 의병운동 알릴 귀중한 문화유산”
구한말 호남의병운동의 지휘 총사령부였던 호남창의회맹소 현장으로 알려진 장성 “석수암” 터가 1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석수암(石水庵)은 각종 문헌에 기삼연(1851~1908) 의병대장이 1907년 10월 각지의 의병장을 모아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한 현장으로 호남지방 후기의병운동을 주도하며 장기 항전을 지휘했던 현장이지만 추측만 무성할 뿐, 지금까지 흔적을 찾지 못했다.
6일 장성군 관계자는 “지난해 말,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인근에 위치한 수연산 8부 능선에서 석수암 관련 유적과 유물 상당수를 발견했다”고 밝히고 “정확한 내용을 밝히기 위해 올 2월 경에 관동리 석수암 일대에 문화유적 지표조사 실시 용역을 의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장성군은 지난 12월 장성군 문화관광과 학예연구사 등 담당자와 현지 마을민들이 동행, 어르신들의 옛날 기억과 고증을 바탕으로 현장 탐사에 나서 이같은 성과를 거뒀다. 장성군은 지난해 8월에도 장성투데이 취재진과 함께 탐사를 시도했으나 우거진 숲과 계곡 때문에 현장을 찾지 못했다. 이번 석수암 현장 발견으로 호남의병 연구가 실증적으로 이뤄지고 한국 의병사를 재조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장성에 또 하나의 귀중한 문화유산 자료가 추가될 전망이다. 발견된 현장은 수연산 입구임을 알리는 수연동문(隨緣洞門)이라는 글씨 바위와 연병장으로 추정되는 하단부 석축 수십 미터, 중간 건물지 석축, 붕괴된 건축물 잔해, 형태를 가늠케하는 화장실과 양철판 지붕, 우물터, 그리고 도자기와 항아리, 기와편 등 유물 유적 수십 가지 종류다.
석수암은 한국전쟁 때까지 사찰의 형태를 유지했으나 발길이 끊어지면서 70년대까지 종교재단 기도원으로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에는 숲이 우거진데다 국방부 소유 예비군 훈련장으로 편입돼 민간인 출입이 금지돼 반세기 동안 초야에 묻혀 있었다. 때문에 의병사를 연구하는 학계에서나 향토사 연구가들, 후손들이 그 현장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번 발견 소식을 전해들은 김봉수 장성문화원장은 “석수암의 발견은 장성이 호남의병운동의 중심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뒷밭침하는 증거자료로서 장성의 근대역사와 그 정신사를 재조명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보였다.
한말 의병장인 김태원 장군의 후손이면서 광복회광주시지부장을 맡고 있는 김갑제 회장(68.한말기념사업회장)은 “실로 대단한 발견이다. 석수암에 있던 호남창의회맹소는 전라도 의병을 조직화하여 한곳으로 집약시킨 현장으로 학술적 실증적 조사를 통해 반드시 복원돼야 할 자랑스런 유산”이라고 말하고 “한말의병 기념사업회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복원운동에 힘을 보탤 것”이라 밝혔다.
김 회장은 “석수암을 중심으로 한 한말 호남의병정신은 독립운동과 독립군을 낳았고, 독립군은 광복군을 낳았으며 광복군은 한국 국군의 뿌리가 됐다. 석수암은 나라가 국민을 버리고 국민을 보호하지 못할 때에도 국민이 분연히 일어나 깃발을 높이 든 호국성지라 할 수 있다”고 그 가치를 평가했다.
<관련 기사 6면 계속> /백형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