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란 1907년 기삼연(奇參衍 1851~1908)을 중심으로 결성된 의병연합부대를 말한다.
자세히 말하자면 1907년 10월 30일 장성의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庵)에서 의병장 기삼연의 의병부대를 포함한 4∼5개의 호남 서남부지역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결성한 의병연합부대로서, 짧은 기간이지만 1908년 1월까지 호남지역 의병의 사령부로 기능을 하며 1909년까지 호남지역이 한말 의병 항쟁의 중심무대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의병운동의 성지다. 나라 잃은 설움에 겨워하던 우리 선열들의 피로 물든 구국의 깃발이 용솟음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호남창의회맹소를 이끌던 의병장은 바로 기삼연 선생이다.
선생은 장성군 소곡리(小谷里) 탁곡(卓谷)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일반 유생들과는 달리 이론적 성리학에만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다. 유교 경전 이외에도 도교, 불교의 경전과 패관, 야사, 병법에 이르기까지 많은 책을 탐독했다.
1895년 8월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고, 같은 해 10월 단발령이 강제 시행되자 전국에서 본격적으로 의병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에 선생도 1896년 3월 기우만, 고광순 등과 함께 광주에서 거의하여 토적복수(討賊復讐)를 다짐한다. 선생은 장성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광주로 진군하여 기우만의 의병부대와 합세한다. 호남에서의 이러한 기세는 전국 각 고을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친일파의 조정대신들과 일제의 탄압에 의해 의병부대가 해체되자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선생은 동지들과 분연히 손을 잡고 일어난다. 1907년 음력 9월 수연산에서 의병봉기의 깃발을 든 것이다. 선생은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에 추대되자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항쟁을 촉구하고 병사 모집에 나서는 한편, 적에게 부역하는 자의 처단 및 재산 몰수를 경고했다.
그리고 광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봉기 사실을 알리고 <대한매일신보>사에는 “백성이 일본군을 잡아오면 상금 100냥을 주고 친일단체인 일진회원이 일본군을 잡아오면 지금까지 죄를 용서해주고 상금 100냥을 주겠다”는 글을 보내 의병항쟁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각 의병장을 중심으로 단위 부대를 편성하고, 각지로 분산하여 활동하도록 한 뒤, 선생은 장성 지역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북상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1907년 10월 29일 고창 문수사에서 선봉장 김태원 장군이 거느린 의병부대와 함께 일본군을 격파하고, 주민들로부터 군량 등 군수물자를 지원 받아 영광 법성포로 나아갔다. 법성포에는 일본군과 일본인들이 조기어장과 세곡미의 운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일찍부터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7일 선생을 비롯한 통령 김용구, 선봉장 김태원 등이 지휘하여 영광 법성포에 있는 일본 경찰주재소와 우편취급소, 상점, 일본인 가옥 7채를 불태우고 창고에 쌓여 있는 세곡미를 비롯한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일부는 군량미로 노획했다.
그 뒤 선생의 본대는 장성과 담양으로, 통령 김용구가 지휘하는 부대는 고창으로, 선봉장 김태원이 인솔하는 부대는 나주, 함평, 광주로 나뉘어 활동을 전개한다.
이렇게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부대가 기세를 떨치자,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10개 종대로 이른바 ‘폭도토벌대’를 편성하고 탄압에 나섰다.
선생은 험준한 지형을 요새로 삼아 설을 지내기 위해 12월 27일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법성포에서 장성을 지나 1월 30일 담양의 금성산성에 도착했다. 하지만 선생의 의병부대가 도착하여 대오를 정비하고 있던 중, 담양 주둔 일본군경의 습격을 당한다.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탈출 가망조차 없을 때, 마침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깔려 일부 병사들을 이끌고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
선생과 의병부대는 순창의 복흥산에 은신하며 의병을 일시 해산, 고향에서 설을 지내게 한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집결하도록 했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은신처가 탄로나 설날 아침 체포되고 만다.
체포 소식을 접한 선봉장 김태원은 의병 30여 명을 인솔하고 즉시 출동, 선생을 구하러 샛길을 따라 광주로 향했으나 일본군은 담양에서 곧 바로 광주로 호송을 끝낸 뒤였다.
일경은 의병부대가 구출하러 올 것을 우려해 체포된 하루만인 1908년 음력 1월 2일, 재판도 없이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기삼연 대장을 총살, 5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선생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읊었다는 시 구절은 그 날의 안타까움을 대변하고 있다.
“군사를 일으켜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出師未捷身先死)
해를 삼킨 젊은 날의 꿈도 또한 허망하도다(呑日曾年夢亦虛)”
그러나 선생의 순국은 헛되지 않았다. 장성 호남창의회맹소의 깃발과 선생의 순국이 자극제가 되어 호남의병은 더욱 왕성하게 발전하고 호남이 한말 의병항쟁의 중심지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한 맺힌 의병운동 현장인 석수암 호남창의회맹소가 100년 만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장성 정신의 성지로 손색없는 곳이다. 모든 역량을 다해 가꾸고 보듬어야 할 보배로운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