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 출생의 석묘련 큰스님의 숨결이 그대로
산비탈에 아스라이 작은 절이 보인다.
비탈길을 무작정 오른다.
푸른 숲 속을 헤집고 굽이굽이 들어간다. 피안의 언덕을 찾아가는 길을 흉내 냄일까? 다행히 승용차로 갈 수가 있어 안심이면서도 한편으론 못내 아쉬움이 밀려온다. 차라리 포장도로가 없었다면 두 발로 터벅터벅 올랐을 텐데...
장성군 서삼면 추암리 백련동 묘현사를 찾아간다.
장성읍에서 황룡면을 지나 추암계곡을 향한다. 백련동에 접어들어 해인사 표지판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왼편에 묘현사란 간판이 나온다. 절간이 있는 곳에 다다르고 보니 해발 450m란 높이가 실감 난다.
편백숲으로 둘러싸인 축령산의 팽팽한 정기가 온몸에 느껴지는 산세다.
어림잡아 15년 전, 문수산 터널 뚫기 작업이 한창일 때 환경보호를 위해 취재차 찾아온 절간이어서 그다지 낯설지는 않으나 많이 달라졌다.
당시 호남고속도로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이어지는 샛길 도로를 뚫기 위해 담양-고창 간 터널을 내면서 이 묘현사를 관통하는 설계가 이뤄졌는데 이를 막아야 한다는 간절한 하소연 때문이었다. 당시 석묘각 주지스님은 “한국불교 법화경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묘현사가 훼손돼서는 안 된다. 한국 불교의 뿌리를 흔드는 일이다”며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로공사와 건설회사는 막무가내로 작업을 강행했다.
당시 스님은 국운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터널이 뚫린 뒤에는 국가적으로 나쁜 일들이 벌어졌다. 터널이 뚫리면서 2004년 박태영 전남도지사가 자살했고,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자살, 김대중 대통령 사망 등이 이어졌다.
안타까운 과거사를 간직한 묘현사에 올라 숨을 돌리니 앞에 펼쳐진 경관이 한마디로 장관이다. 보이는 것 모두가 청량함 그 자체였다. 만세상이 발아래 펼쳐져 있다.
가까이는 울창한 편백이요, 중간에는 장성군의 너른 들녘과 장성읍 아파트, 그리고 저 멀리에는 무등산과 광주광역시의 아파트가 희미하게 나타난다. 문득 한 움큼의 구름이 하늘 위에서 펼쳐졌다 사라진다.
가슴을 열고 편백향을 들이켜 본다.
한 마리 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스친다.
아, 이런 곳에서 무한한 자각의 날개를 펴고 깨달음을 찾아 나선다면, 참새가 되어도 그만이고 봉황이 되어도 그만 일 텐데...
“어허, 네 끼 이놈, 보리심(菩提心)이란 이곳에도 있고 또 있다가도 없는데 네가 그곳으로 찾으러 간다고 될 성싶으냐?”
괜한 망념에 젖어있는데 조용한 절간에 죽비를 내리치듯 저 멀리서 인기척이 들린다. 절간 살림을 맡은 보살님이 나와 스님께 안내한다. 올해 세수(世壽) 82세의 노스님이시다. 법명이 묘각스님으로 우주를 넘나드는 법력을 가지신 분으로 알려졌다.
이곳 절 이름은 대한불교 현광종 묘현사로 돼있다. 그 흔한 조계종이나 태고종이 아니다. 절간을 다녀보신 분들 사이에서도 잘 모르는 분들이 많다.
대한불교 현광종은 묘련대사(1924~1998)께서 개종(開宗)하신 불교 운동의 일환이다. 스님은 남원 실상사에서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고 지리산 법계사와 무주암에서 법화경 기도를 하다 만다라(曼陀羅 : 불법의 모든 덕을 두루 갖춘 경지를 이르는 말)를 이루시고 실상묘법연화경(實相妙法蓮華經)을 시현(示現 :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냄)했다.
법화경(法華經)이란 원래 실상묘법연화경을 말함인데 이 말을 굳이 풀이한다면 ‘모든 실제의 모습이란 빛으로 피어나는 묘한 법의 흐름’ 정도로 해석된다. 법화경은 우주의 큰 기운을 바탕으로 한다.
묘련 큰스님은 “실상묘법이 본자유지하니 묘법연화경이 오색심에 본래구족청정하여~”로 이어지는 게송을 남기셨다.
불교의 모든 경전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법화경을 독특한 이론으로 다시 만세상에 설법하시며 현광종을 개종하신 것이다.
묘련 큰스님은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서 태어났는데 해방 직후인 23세에 출가하여 여러 훌륭한 스승과 명찰을 만나 많은 법문과 업적을 남기셨다. 그 가운데서도 6.25 직후 이곳 장성에 돌아와 묘현사 도량을 닦게 된 것이 오늘의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속가의 친형님(묘련 큰 스님)이 스님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독야청청 큰 걸음을 걷고 있을 때 깨달은 바가 있어 뒤따라 출가를 결심한 동생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의 묘련사 주지 묘각스님이시다.
“스스로 짓는다
그것이 중생이다.
스스로 비운다
그것이 부처다”
“산중에 사람이 없어요. 머리만 깎았다고 중이 아니지요. 중이 중다워야 하는데 그런 중이 좀처럼 안보이는 겁니다”
노 스님의 일갈이다.
우리 같은 범부들의 세계보다는, 덕지덕지 때가 묻은, 아수라장이 된 불교계의 잘못된 꼴을 비유함이다. 팔순을 넘긴 연륜답게 묘각 스님은 담담한 가르침으로 경내를 울린다.
“승려가 뭡니까? 상구보리 하화중생 즉 중생을 계도하고 앞선 생각을 해야 할진데 스스로가 어두운 그늘을 만들고 그 곳을 찾아가는 것 같아요”
그렇다.
우선 스스로를 자성하고 난 뒤에 누구에게 말할 자격이 있는 법이니까. 자신도 머리를 깎은 스님이지만 스님답지 못한 오늘날의 한국불교에 대해 실컷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게다.
옛 적 한 스님이 그랬단다.
찬 새벽 예불을 드리기 싫어서 법당에 가지 않고 침소에서 머물렀다.
“왜 이리 나태해지셨습니까”
옆에 동자승이 힐란하자
“꼭 법당에서 예불을 올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마음의 예불을 올리는 것도 또 하나의 수행이다”
그런데 곧 이어 아침 공양시간이 되어 그 스님이 공양간에 나타나자 또 물었다.
“어찌 공양을 드시러 나오셨습니까? 침소에서 마음의 공양을 드시는 것도 훌륭한 수행일텐데요”
결국 그 스님은 밥상 앞에서 부끄러운 자신의 행동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어이없는 자기 편의주의를 일컬음이다. 자기방식만 고집하는 세상에 대한 훈계다. 최근 세상을 뜨겁게 달군 조계종의 부끄러운 파문을 해석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는 비유다.
묘각 스님의 세상을 향한 직설은 계속된다.
“세상에는 질량불변의 법칙이란게 있지요. 지구를 포함한 우주에는 4겁(四劫)이란 게 있단 말입니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이 그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생겨나고(성 成) 머물다가(주 住) 허물어져서(괴 壞) 다시 허공으로(공 空)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의 공은 사라져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변화를 뜻합니다. 새로 태어남이지요. 사겁은 순회하는 겁니다.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입니다”
여기 한방울의 빗물이 강물로 변하고 바다로 흘러가 기화하여 또 빗물이 되고 식물의 몸체가 되고 동물이 풀을 먹고 체외로 배출하는 무한의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양초를 태우면 양초는 사라지지만 열과 그을음, 빛 등으로 변해 또 다른 세계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주의 본체는 마음이다.
팔만대장경을 한글자로 표현하라고 하면 心이라고 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사고가 난다.
흔들리는 마음이 가자는 데로 가면 욕(慾)이 나타난다. 색욕, 금욕, 권력욕 등이다. 편하고 쉽고 즐거운 길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참됨을 찾아가는 마음이다.
과거와 미래는 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을 갈고 닦는게 필요하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올 오늘이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도 살고 싶었던 내일인데...”
오지 않을 미래에 업을 짊어지고 갈 필요도 없다. 오지 않을 미래를 위하여 부를 축적할 필요도 없다. 아직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해 너무 겁먹고 살 필요는 없다.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짓는다
그것이 중생이다.
스스로 비운다
그것이 부처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가장 짧은 시간 단위는 것이 찰나(刹那)인데 이는 75분의 1초이다. 또 너무 길어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겁(劫)이라고 한다. 수많은 찰나의 연속이 우주의 모든 것이다.
하지만 우주는 무시무종(無始無終), 그 처음과 끝이 없다. 광대무변이다.
영겁의 시간들은 오직 마음으로부터 출발하고, 그 마음 안에 있을 뿐이다.
텅 빔이 부처다.
텅 비어 단순하면 거기가 부처의 숨결이다.
어찌 멀리서만 부처를 찾으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