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후, 장자(莊子)가 들판에서 유유히 산보를 하던 중 큰 꾀꼬리 한 마리가 갑자기 과수원 사이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장자는 갑자기 나타난 꾀꼬리가 무언가를 노리는 듯한 신속함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활을 들고 과수원으로 가 그 꾀꼬리를 잡으려고 했다.
꾀꼬리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 부근에 살그머니 다가가 활을 조준하여 막 쏘려고 하는데 그 꾀꼬리는 장자가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곳만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잠시 활을 내려놓고 자세히 보니 꾀꼬리가 노려보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사마귀였다. 그런데 그 사마귀는 나뭇잎으로 자신을 숨기면서 앞에 있는 매미를 잡으려고 긴장하여 웅크리고 있는 것이었다.
장자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겨 결국 활을 내려놓고는 탄식하여 말했다.
“아하, 이것들이 그저 눈앞의 먹을 것만 볼 뿐 자기 뒤에 도사리고 있는 엄청난 위험에 대해서는 이토록 생각이 없구나!”
장자가 이처럼 한탄하며 사색에 잠겨 있을 때, 과수원 주인이 갑자기 나타나 장자가 과일을 훔쳐가는 줄 알고 전후 사정을 물어보지도 않고 욕을 하며 내쫓았다. 대꾸할 시간도 없이 과수원 주변에서 뛰쳐나왔다. 고매한 학식을 가진 자나 걸인이나 ‘도둑’이란 누명을 쓰는 것은 똑같았다.
장자가 집에 돌아와 며칠 동안 마음에 충격을 되새기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있었다.
근심하던 제자들은 ‘무슨 걱정거리가 있느냐’고 물었다. 장자는 과수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는 크게 뉘우치며 말했다.
“당시 나는 그 꾀꼬리와 곤충들의 무지몽매에 대하여 탄식하고 있었는데 정작 내 뒤에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줄은 정말 모르고 있었다.”
장자는 ‘큰 그림으로 본다면 나도 꾀꼬리나 사마귀나 매미와 전혀 다르지 않구나’라고 탄식했다.
이것이 바로 당랑포선 황작재후(螳螂捕蟬 黃雀在後)란 고사가 탄생하는 배경이다. 황작이란 꾀꼬리를 뜻하는 말이다.
(螳:사마귀 당, 螂:사마귀 랑, 捕:잡을 포, 蟬:매미 선, 黃;누를 황, 雀:참새 작, 在:있을 재
後:뒤 후)
‘한시외전(韓詩外傳)’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춘추시대 오나라 왕 수몽이 국력이 커지자 오만하여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를 밥 먹듯이 했다. 신하들은 ‘침략전쟁은 옳은 일이 아니다’며 반대했으나 왕이 너무 완강히 밀어붙이자 끝내 아무도 반대를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신하가 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꾀를 냈다.
그 신하는 왕이 다니는 길목에서 온 몸이 비에 젖은 채 활 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왕이 보고 묻자 신하가 말했다.
“저 앞의 나무를 보니 사마귀가 앞에 있는 매미를 잡으려 하는데 참새가 뒤에 있음을 모르고, 참새가 앞에 있는 사마귀를 잡으려 하는데 활 가진 제가 뒤에서 쏘려고 하는 것을 모르고 있더이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후회하여 마침내 전쟁을 일삼으려는 자기 고집을 꺾고 그 신하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그럼으로써 오나라는 다른 나라와의 유대관계를 새롭게 하여 평화를 가져 올 수 있었다.
이 두 고사는 우리들에게 ‘그저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려 자기가 처한 환경과 발생이 가능한 위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 가르치고 있다.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덤비면 결국 큰 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유사한 성어로 득의망형(得意忘形)이란 말이 있다. ‘뜻을 이루자 기쁜 나머지 자기 자신 마저도 잊다. 자만하여 자신의 처지를 잊다’는 뜻이다.
이 말은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로 의지하다 출세의 길에 나선 완적이라는 사람이 ‘뜻을 이루자 기쁨에 겨워 자신의 형체도 잊어버렸다’는 뜻의 당기득의 홀망형해(當其得意 忽忘形骸)라는 말에서 유래 됐다.
너무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몰라 춤추며 날뛴다는 뜻의 수무족도(手舞足蹈)와 비슷한 말이다.
무릇 사람은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무모하게 행동한다면 결국 큰 해를 입게 됨을 경계해야 한다.
사마귀와 매미와 꾀꼬리의 관계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나를 위해 타인을 희생양 삼지 말 일이다.
나 자신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희생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힘으로 누군가를 누르려 하지 말 일이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누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온 세계가 코로나 대란을 앓고 있다.
온 나라가 먹고 먹히는 정치 대란에 휩싸여 있다.
이런 시기엔 윤리와 도덕의 개념이 실종된다.
하지만 경제질서에서도, 정치에서도 갑질하는 자, 언젠가는 갑질의 서러움에 통곡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서럽지 않다고 아들 손자까지 영원히 서러움 없이 산다는 보장은 못한다.
돌고 도는 게 세상사라 하지 않았던가.
도는 바퀴가 크고 작음에 있을지언정 영원이라는 것은 없다.